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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소에서 글을 보다가 내일이 4.3일이라 제주 4.3 관련 글을 옮겨 봅니다.

제주 4.3 평화 기념관

1947년 3월 1일,  되찾은 조국에서 다시 외쳐 본 " 대한독립 만세! "
그 가슴 벅찬 함성이 길고 긴 비극의 시작일 줄이야.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이 났지만 미, 영, 소련은 독립한 조선이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다고 판단해 3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한다. 이를 진행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지만 잦은 마찰을 빚는다. 이에 미국은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유엔에 제의하고 유엔의 찬성으로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

불과 40여년 전 하나였던 나라가 둘 로 나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국민들이 시위에 나섰고, 전국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그 진압과정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진 곳이 바로 제주이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가 들어서기 전, 미군정은 통치의 혼란을 피한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시절 공무원과 경찰을 요직에 그대로 앉힌다.

1948년 당시 인구 25만여 명의 제주에는 일본군이 6만 7천여명이나 주둔 중이었다. 전쟁 막바지 제주도는 미군이 일본 본토를 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할 요충지였고, 일본 입장에서는 본토 방어와 대륙 진출의 교두보였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초등학교 졸업할 나이만 되면 끌려가 일본의 군사시설을 구축하는데 강제동원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깊은 한이 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28년 만에 해방된 조국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경찰이 탄 말이 어린 아이를 치어 부상을 입힌다. 그런데 그 경찰은 나몰라라 가던 길을 가버린다.
이에 화가난 시민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 했고, 경찰은 항의 하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한다.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중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제주도민은 반경찰, 반정부 운동을 일으키고 직장인 95%가 총파업에 돌입한다.
1년여 남짓한 기간 동안 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구금된 인원은 집게 된 숫자만 2500여 명이 넘는다. 이 중에는 경찰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 시위는 남한 단독정부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350여명의 무장한 제주도민들이 12개 경찰지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군중에 대한 폭력적 탄압 금지와 남한 단독 선거 /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였다. 군경은 시위 군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4.3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군과 경찰은   '공산계열의 반민족적이며 파괴적인 분자들의 지도 아래 흉기를 가진 무장세력들이 경찰서, 관공서, 선량한 동포 등을 살해하며 방화 및 폭행하며 만행을 저지른다' 고 공표하고 무차별 진압작전에 돌입한다.

육지의 군 병력이 동원되고, 서북청년단을 투입해 소위 ' 빨갱이 소탕작전 ' 이 벌어진 것이다.
이 작전은 한라산 입산 통제를 해제하며 대규모 진압이 종결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진다.
1950-1953
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 내내 그리고 끝난 이후까지 이어졌다.
전체 제주도민 1/9에 해당하는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제주도 곳곳 성한 곳 하나 없이 집은 불타고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이후 군부가 집권하는 시기 내내 제주도민은 물론 남한 땅에 사는 이들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 때의 교과서엔, 이 사건을 '폭동'이라 서술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나 역시 이렇게 교육 받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야 말았다.

2022년 3월29일 재심청구를 받아 들인 재판부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피고인들이 군법회의에서 선고받은 범죄 사실과 같은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하고, 검사는 공소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가 없어 무죄를 구형했다"면서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4·3 수형인에 대한 직권 재심 첫 공판이 진행된 29일 오전 4·3 희생자 유족들로 가득찬 제주지법 201호 법정 안에 긴장감이 가득 돌고 있다./오마이뉴스
 

어느 특별한 4.3 판결문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지만"

"피고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직권 재심으로 피해 수형인 40명 명예회복

www.ohmynews.com


봄새벽 일찍 눈을 떴다.
나는 여전히 설워할 봄이라도 있다.
74년의 세월동안 제주의 봄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상춘객들의 발길에만 흥겨운 봄이 있을 뿐이었다.

켜켜이 쌓인 한은 유채꽃보다 선명했고, 푸른 바다빛보다 차가웠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삼춘들의 넑두리가 바람처럼 피는 봄이다.


책장에서 노래자락 하나 꺼내 읊어 본다.

< 봄의 승리 > 박노해

아무리 뛰어난 머리도 가슴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어떤 경륜도 젊은이의 순수함을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빠른 것도 뿌리 깊은 것을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잘나가도 정도를 걷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강하고 굳센 것들은 결국 부드러운 것들을 이기지 못한다
거대하고 빛나는 것들은 작은 것들의 아름다운 평화에 이르지 못한다
투쟁은 아무리 승승장구해도 나직한 사랑하나 끝내 이기지 못한다
작고 눈물겹고 부드러운 것들이 말없이 피어나는 봄
, 그리고 나눔.

 

글 - 손영 2022.03.30


제주 4.3 사건 사진

제주지법 4.3재심전담재판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이날 검찰 '직권 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재심 대상자 전원 40명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 마무리께 준비한 글을 낭독했다.

판사가 망자 대신 전한 말

장 부장판사가 인용한 글 속엔 제주 4.3 사건의 고통이 축약돼 있었다. 4.3 사건을 연구하고 기록해 온 시인의 책이나, 공권력의 폭압을 지나온 제주도민들의 사투리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 수 있다)"가 판결문 곳곳에 인용됐다. 4.3사건의 아픔을 기록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도 장 판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장 판사는 동시에 피고인이자, 피해자인 망자들을 대신해 전했다. 그는 "피고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한다"고 입을 뗀 뒤 "당신은 설워(서러워)할 봄이라도 있지만..."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제주 출생 시인인 허영선 4.3연구소장의 책 제목(<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지만>)을 따온 것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아니 없다고 하기 보다는 가해자들은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기에 

언제가 되어서야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로  진실이 밝혀질지 모르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집단 규모가 크기에 진실 규명에 대한 공전은 오래도록 자속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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